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스 가믈랭 (문단 편집) === 말년 === 프랑스가 패배한 뒤 가믈랭은 1940년 9월 6일 체포되어 [[에두아르 달라디에]], [[폴 레노]], [[레옹 블룸]]과 함께 패배의 책임을 묻는 리옹 재판에 회부되었다. 이 재판은 [[비시 정부]]에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올리고 패전의 책임을 전가하며 반대파들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인 재판이었다. 그 근거로 [[프랑스 침공]] 당시 패전에 책임이 큰 졸장들은 가믈랭 외에도 [[막심 베이강]]을 위시로 수두룩했지만, 기소된 것은 페탱이 권력을 잡는 것을 거부했던 가믈랭이 유일했다는 점이 있다.[* 물론 가믈랭의 책임이 가장 컸음은 부정할 수 없다. 동맹국들을 경악하게 만든 군사 운용은 물론이고 후퇴 시 장비를 버리고 가기까지 했으니 페탱이 항전을 선택해도 결과가 좋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.] 가믈랭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은 전부 항전을 주장했던 정치인들뿐이었다. 가믈랭은 재판에서 침묵을 지켰다.[* 공산주의자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돌렸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 책임회피를 한 것은 베이강이었다.] 재판이 순 억지라서 정치인 출신의 피고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자 재판정의 논리가 궁색해지면서 영 지지부진해졌고, 견디다못한 히틀러는 비시 정권에 재판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. 1942년 11월 독일군이 비시 정권을 무너뜨리고 프랑스 전역을 장악할 때 체포되어 부헨발트 수용소에 투옥되었다.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스트리아의 이터 성채로 이송된 가믈랭은 1945년 5월 5일 미군에 의해 구출되었다.[* 참고로 이때 벌어졌던 [[이터성 전투]]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을 남긴 제 2차 세계 대전의 공식적인 마지막 전투로 유명하다. '''[[미군]]과 [[독일 국방군]]이 연합했기 때문.''' 이 기묘한 연합군이 상대한 적은 바로 [[무장친위대]]였다.] 전후 프랑스로 귀환한 가믈랭은 회고록을 출판했는데, 그 내용은 1940년 프랑스군의 졸전에 대한 자신의 변명을 늘어놓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. 그 뒤에도 명예 회복을 위해 애쓰던 가믈랭이었지만 프랑스에서 비웃음 속에 묻혀져 1958년 4월 18일 쓸쓸히 [[사망]]했다. [[향년]] 86세. [[분류:1872년 출생]][[분류:1958년 사망]][[분류:프랑스의 군인]][[분류:제1차 세계 대전/군인]][[분류:제2차 세계 대전/군인]][[분류:파리 출신 인물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